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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p ~ 204p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2)

 ㅡ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는 종류의 차이도 있지만 작용 속도의 차이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을 구분한다. 시원한 물 한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행위는 동적인 쾌락을 준다. 물을 마신 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만족스러운 기분은 정적인 쾌락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물을 마시는 행동은 동적인 쾌락이고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우리는 보통 동적인 쾌락이 가장 큰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목표지 수단이아니다.

 ㅡ 현재 우리는 쾌락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우리를 애태우는 수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에프쿠로스라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유인하는 가짜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미끼를 겨냥하는 짓을 멈추라고 에피쿠로스는 조언한다.

☆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 쾌락이라는 단어 자체가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적인 쾌락에서 오는 희열감과 만족감에서 오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 이 후 상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정적이고 어두운 단어라고 인식되었나보다. 정적인 쾌락을 수단으로 삼지말고 목표로 삼는다면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즐기는 법)이 아주 괜찮을 수 있다. 20분간 마사지가 10분 마사지 받는다고 2배로 시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즐기는 것이 중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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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p ~ 198p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ㅡ 모든 철학자는 모든 10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원래 그런 법이다. 하지만 쾌락을 말한 위대한 철학자, 에피쿠로스만큼 크나큰 오해를 받고 부당한 비난을 받은 철학자는 없다. 기원전 341년에 사모스섬에서 태어난 에피쿠로스는 어린 나이에 철학자가 되었다. 이유는 평범했다. 의문이 많았고, 어른들이 내놓은 답이 무척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종종 다채롭고 충격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소크라테스처럼 미친 지혜를 실천했다. 세상에는 열정적인 철학 애호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닌, 숫기 넘치는 정열을 가진 열정적인 철학 애호가. 세상의 소음에서 격리된 정원은 그러한 철학적 열정에 도움을 준다. 정원사는 자연과 협력한다. 정원사는 식물을 심고 삽으로 흙을 파내고 잡초를 뽑으며 자연을 돕지만, 결국 정원의 운명은 정원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정원의 벽 안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자연의 흐름을 따른다. 철학도 그 안에 자기만의 마법을 담고 있다.

# 위에 말에 빗대어 보면 자기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잡초를 뽑고 흙을 파낸다고 정원의 운명은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쁘고 멋지게 관리 한다면 멋진 정원이 될 것은 분명하다.

 ㅡ 에피쿠로스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오로지 우리의 감각만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감각이 완벽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밖에 다른 믿을만한 지식의 원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착각을 한 것이거나 무언가를 팔고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감각을 갈고 닦았다. 그는 인간 행동의 훌륭한 관찰자였다. 그는 철학이란 모름지기 영혼을 위한 약처럼 나눠져야한다고 말했다.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주요 원칙은 "네 가지 치료법" 이라는 뜻의 테트라파르마코스 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약처럼 철학도 일정 간격을 두고 처방된 양을 섭취해야한다. 약처럼 철학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어지러움, 방향 감각 상실, 조증 삽화 까지. 그 시기에 사람들은 오늘날 배우자나 통신사를 고를때처럼 열정적이고 신중하게 철학 학파를 골랐다.

 ㅡ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쾌락은 의심스럽다. 쾌락은 어두운 곳에 닫힌 문 뒤에 머문다. 은밀한 쾌락이나 숨겨진 쾌락 같은 말을 할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이 인간 본능에 수치심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다. 어린아이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쾌락과 고통이다. 

 ㅡ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 라는 뜻이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 주의자였다.

#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쾌락을 즐기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난을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 본성은 쾌락과 고통에 반응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의 의미는 고통의 반대말이 아닌 것 같다. 

★ 에피쿠로스 : "우리는 오직 딱 한 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삶이 우연의 결과물, 원자 운동에서의 일탈, 일종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삶을 찬양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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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p ~ 181p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3)
 ㅡ 나는 쇼펜하우어처럼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침울함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 인간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완벽한 지식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걸 확신할 수 있을까? 염세주의는 나에게는 없는 확신을 필요로 하며, 그 점에서 나는 감사하다.

 ㅡ 쇼펜하우어는 명상을 하지 않았다. 세속적 즐거움을 단념하지도 않았다. 고급 요리와 값비싼 옷을 즐겼고 평생 왕성한 성생활을 하며 "생식기관은 세상의 진정한 중심"이라는 말도 남겼다. 어떤 사람은 서양 철학이 다른 곳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근시안적 철학이라고 말한다. 사망한 백인 남성, 오로지 백인 남성만 가입할 수 있는 철저히 배타적인 클럽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난이 어느 정도 진실이기는 하지만 서구 철학이라는 천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동양의 실이 엮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가르침을 걸신들린 듯 빨아들였고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해"에 마음을 빼앗겼다. 불교를 공부하며 불교는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도 선언했다.
 
 ㅡ 예술과 음악의 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는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미학 이론을 전개했고 여러 예술가와 작가에 수 세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 쇼펜하우어의 비관적인 세계관을 의심하고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멋진 사람이다.

 ㅡ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 작가는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접하게 된다. 많은 정보와 데이터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부정적이며 내가 알려고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지 말자.

 ㅡ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을 밀어낸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그 목소리들을 쫓아내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이로써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제 3장을 다 읽었다. 비관적이고, 심오한 그의 염세적인 세계관 때문인지 좀 더 심도 깊게 읽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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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p ~ 170p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
  ㅡ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이었던 첫 번째 철학자도, 마지막 철학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매우 독보적인 염세주의자였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여태껏 염세적인 철학자는 여럿 있었지만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파고든 철학자는 쇼펜하우어 단 한명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이 이 세상을 지어낸 저자라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그의 생각이고,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다.

 ㅡ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는 이상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관념론자들은 오로지 우리의 의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들은 세계는 존재하지만 우리 정신의 구성물로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냉장고 불빛을 떠올려보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불이 들어온다. 냉장고의 불이 항상 켜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 염세주의라는 말을 구글링해보았다.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라고 칭한다. 아주 부정적인 말만 섞여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감정적인 우울함이 아닌 그 의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철학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바가 다르다. 저 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거라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말) 이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해줄줄을 알아야 한다.

 ㅡ 쇼펜하우어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역설 중 하나는 매우 프로이트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문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 / 아버지와의 문제 (너무 가부장적이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을 밀어냈다. 원하면 매럭적인 사람처럼 굴 수 있었지만 그런 때는 드물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잠시 괴테와 교제했을 때를 제외하면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군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움을 주지만 그 사람은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나도 그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인간 관계에 대하여 끊임 없는 고민과 수정을 요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 참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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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p ~ 152p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ㅡ 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기 훨씬 전인 어린시절에 형성되었다. 열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다.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ㅡ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점점 심해지며 절망의 블랙홀이 되었다. 이 염세주의 철학자는 우리 모두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가르쳐준다.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만 감사와 연민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신비주의자처럼 이러한 인식이 환상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ㅡ 듣기는 쇼펜하우어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 세상의 소음을 넘어 자신의 직감 듣기. 지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국어로 말하는 다른 목소리 듣기, 인간 혐오와 심술궂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가치있게 여겼다.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 잘 들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말을 아끼고 귀를 열고 진심으로 듣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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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p ~ 144p

소로처럼 보는 법(3)
 ㅡ 우리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볼까? 대부분은 사진 모델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한 뒤 우리 뇌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소로는 그런 경향을 경계했다.

★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ㅡ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상기시킨다.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정으로 목격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바라봐져야만 한다.

#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느끼냐가 어떻게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를 알게 해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로는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이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라고 판단했다.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ㅡ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달라지고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다. 

 ㅡ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것이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가 분산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나간다. 우리는 왜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이를 눈의 어슬렁 거림이라 칭했다.

#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겉만 봐서 빠르게 판단하면 안된다. 모든 곳에 해당되지 싶다. 4장 소로처럼 보는 법을 읽으면서 시각적으로 느끼고 깨달음을 알 수 있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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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p ~ 144p

소로처럼 보는 법(3)
 ㅡ 우리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볼까? 대부분은 사진 모델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한 뒤 우리 뇌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소로는 그런 경향을 경계했다.

★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ㅡ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상기시킨다.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정으로 목격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바라봐져야만 한다.

#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느끼냐가 어떻게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를 알게 해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로는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이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라고 판단했다.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ㅡ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달라지고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다. 

 ㅡ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것이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가 분산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나간다. 우리는 왜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이를 눈의 어슬렁 거림이라 칭했다.

#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겉만 봐서 빠르게 판단하면 안된다. 모든 곳에 해당되지 싶다. 4장 소로처럼 보는 법을 읽으면서 시각적으로 느끼고 깨달음을 알 수 있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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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p ~ 119p

소로처럼 보는 법(2)
 ㅡ 소로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의 외무를 언급했다. 투박하고 어딘가 촌스럽다, 힘세고 재주가 많다, 예민한 청력, 예리한 후각등을 언급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로의 눈이었다. 아무도 소로의 눈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로의 시력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힐끗 보기만해도 나무의 높이나 송아지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눈으로만 보고 연필 한 무더기에서 정확히 열두 자루를 집어냈다. 소로는 인신록적 난제에 엮이길 거부 했다.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우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 철학 이었다.

 ㅡ 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악할 수 있다. 소로는 보이는 것을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더 관심 있었다.

# 내가 무엇을 볼 때에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보는 관점)을 더 중요시하게 여겼고,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고 한다. 보는 관점을 키워야 된다. (주식 /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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