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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p ~ 170p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
  ㅡ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이었던 첫 번째 철학자도, 마지막 철학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매우 독보적인 염세주의자였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여태껏 염세적인 철학자는 여럿 있었지만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파고든 철학자는 쇼펜하우어 단 한명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이 이 세상을 지어낸 저자라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그의 생각이고,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다.

 ㅡ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는 이상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관념론자들은 오로지 우리의 의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들은 세계는 존재하지만 우리 정신의 구성물로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냉장고 불빛을 떠올려보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불이 들어온다. 냉장고의 불이 항상 켜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 염세주의라는 말을 구글링해보았다.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라고 칭한다. 아주 부정적인 말만 섞여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감정적인 우울함이 아닌 그 의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철학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느끼는 바가 다르다. 저 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거라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말) 이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해줄줄을 알아야 한다.

 ㅡ 쇼펜하우어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역설 중 하나는 매우 프로이트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문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 / 아버지와의 문제 (너무 가부장적이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을 밀어냈다. 원하면 매럭적인 사람처럼 굴 수 있었지만 그런 때는 드물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잠시 괴테와 교제했을 때를 제외하면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군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움을 주지만 그 사람은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나도 그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인간 관계에 대하여 끊임 없는 고민과 수정을 요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 참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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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p ~ 152p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ㅡ 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기 훨씬 전인 어린시절에 형성되었다. 열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다.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ㅡ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점점 심해지며 절망의 블랙홀이 되었다. 이 염세주의 철학자는 우리 모두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가르쳐준다.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만 감사와 연민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신비주의자처럼 이러한 인식이 환상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ㅡ 듣기는 쇼펜하우어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 세상의 소음을 넘어 자신의 직감 듣기. 지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국어로 말하는 다른 목소리 듣기, 인간 혐오와 심술궂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가치있게 여겼다.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 잘 들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말을 아끼고 귀를 열고 진심으로 듣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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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p ~ 144p

소로처럼 보는 법(3)
 ㅡ 우리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볼까? 대부분은 사진 모델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한 뒤 우리 뇌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소로는 그런 경향을 경계했다.

★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ㅡ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상기시킨다.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정으로 목격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바라봐져야만 한다.

#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느끼냐가 어떻게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를 알게 해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로는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이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라고 판단했다.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ㅡ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달라지고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다. 

 ㅡ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것이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가 분산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나간다. 우리는 왜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이를 눈의 어슬렁 거림이라 칭했다.

#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겉만 봐서 빠르게 판단하면 안된다. 모든 곳에 해당되지 싶다. 4장 소로처럼 보는 법을 읽으면서 시각적으로 느끼고 깨달음을 알 수 있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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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p ~ 144p

소로처럼 보는 법(3)
 ㅡ 우리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볼까? 대부분은 사진 모델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한 뒤 우리 뇌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소로는 그런 경향을 경계했다.

★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ㅡ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상기시킨다.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무엇인가가 진정으로 목격되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바라봐져야만 한다.

#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느끼냐가 어떻게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를 알게 해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로는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이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라고 판단했다.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ㅡ 소로처럼 천천히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은 가장 속도가 빠른 감각, 예를 들어 미각보다 훨씬 빠른 감각이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달라지고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다. 

 ㅡ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것이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가 분산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나간다. 우리는 왜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이를 눈의 어슬렁 거림이라 칭했다.

#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겉만 봐서 빠르게 판단하면 안된다. 모든 곳에 해당되지 싶다. 4장 소로처럼 보는 법을 읽으면서 시각적으로 느끼고 깨달음을 알 수 있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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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p ~ 119p

소로처럼 보는 법(2)
 ㅡ 소로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의 외무를 언급했다. 투박하고 어딘가 촌스럽다, 힘세고 재주가 많다, 예민한 청력, 예리한 후각등을 언급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로의 눈이었다. 아무도 소로의 눈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로의 시력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힐끗 보기만해도 나무의 높이나 송아지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눈으로만 보고 연필 한 무더기에서 정확히 열두 자루를 집어냈다. 소로는 인신록적 난제에 엮이길 거부 했다.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우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 철학 이었다.

 ㅡ 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악할 수 있다. 소로는 보이는 것을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더 관심 있었다.

# 내가 무엇을 볼 때에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보는 관점)을 더 중요시하게 여겼고,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고 한다. 보는 관점을 키워야 된다. (주식 /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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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p ~ 106p

루소처럼 걷는 법(2)
 ㅡ 가끔은 한 번의 산책이 모든 것을 바꾼다. 1749년 어느 여름날 오후의 루소도 그랬다. 루소는 신성을 모독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된 동료 철학자이자 친구 드니 디드로를 방문하기 위해 언제나처럼 파리에서 뱅센까지 약 10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보여행을 떠났다. 걷는 행위는 확실히 루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신은 따분한 사무실, 사람들의 기대라는 폭군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배회하고, 정신이 자유롭게 배회하면 예상치 못한 멋진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일은 항상은 아니지만 우리 생각보다 더 자주 발생한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ㅡ 걸을 때 우리는 무언가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리 머릿속은 바쁘다. 눈앞의 지형에 집중하고 주변 풍경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루소에게 걷기는 숨쉬기와 같았다. "나는 멈춰 있을 때에는 생각에 잠기지 못한다.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만 머리가 잘 돌아간다." 루소는 걸을 때 늘 지니고 다니던 게임용 카드에 크고 작은 생각을 적었다.

 ㅡ 걷기는 자연스러운 행위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두 발로 걷지만 우리의 뼈는 네 발로 걷는 것에 가장 적합하다. 루소는 열성적인 산책자였지만 영웅적인 산책자는 아니었다.

# 무엇을 위해 걸을까? 어떤 것을 잊기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산책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주의 깊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생각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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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p ~ 91p

루소처럼 걷는 법
 ㅡ 장 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식물학자, 독학자, 정치이론가 마조히스트였다.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도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처럼 변덕이 이끄는 대로 이 길 저 길을 따라갈 자유. 루소도 자신의 변덕을 따랐다. 

 ㅡ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걷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반드시 걸어야 했다. 오늘날 보행은 선택이다. 하지만 루소는 마차 여행을 극도로 싫어했고 언제든 늘 걸어다녔다.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 만큼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 요즘 무척이나 더워져서 걷지를 않는다. 한 때 마음이 상했을 때 걸었던걸 생각해보면 많이 힐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노래를 엄청 크게 들으면서 흥얼거리고 배에 힘을 주고 걸었을 때, 괜찮았던 것 같았다. 저녁 만큼은 다시 걷도록 하자.

 ㅡ 루소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루소는 요즘 말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걷기는 루소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평생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걷기는 루소의철학에 딱 맞았다. 루소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창했는데, 걷기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ㅡ 걷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걸음걸이는 지문이나 서명처럼 개개인이 다 다르며 모두에겐 자기만의 걷는 스타일이 있다. 

 ㅡ 내 주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은 바로 루소가 사용한 언어다.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루소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어려운 철학적 표현과 다르다. 곧 루소의 언어에 명확성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나치게 화려하긴 하지만 루소의 글에는 거짓이 없다. 루소는 글을 꾸며내지 않는다. 루소의 철학은 다음 네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적 선함"을 믿었다. 루소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훈연한 브리치즈와 인스타그램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확실하지만 사실은 문화적인 것이다.

# 루소가 왜 걸었는지, 걷는걸 왜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걷는 데에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이지도 않다.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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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p ~ 78p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5)
 ㅡ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에서, 내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인정사정없는 자기 신문.

 ㅡ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는 유명한 날을 남겼다. 상철까지하라고? 성찰하는 삶.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성찰하다라는 단어에는 시험 또는 검사라는 뜻의 단어가 들어있는데, 이 단어를 보면 잊고 있던 시험용 HB연필과 차가운 의사선생님의 손이 떠오른다. 그러니 성찰은 너무 힘든 일 같아 보이지 않나.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히 내가 소크라테스의 성찰하는 삶에 따르는 필연적 결과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실직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성찰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자기 배꼽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보다 결과를 내는 것이, 더 나은 배꼽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사실 의미 있는 융성한 삶이라는 더 큰 뜻이 있다.

2)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건 지나치게 성찰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것이다.

#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성찰하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ㅡ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을지라도 작은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친구로서의 의무를 간과하지 말 것, 명예로운 사람이 될 것, 다른 사람에게 수탉을 빚졌다면 수탉을 갚을 것,

 ㅡ 하지만 더 단순하고 덜 심오한 가능성도 있다. 독배에 넣은 독 미나리의 효과가 나타나서 소크라테스가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지껄였을 가능성이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며, 아마 앞으로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 위 말처럼 철학이라는 자체가 더 단순하고 덜 심오할 수도 있다. 마냥 어렵고 멀리 느껴지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거, 주변에서 행동하는 거 자체도 철학일 수 있다. 내가 경험할 또 하나의 질문일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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